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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물 장군묘
조선시대의 충신 선조26년 임진왜란때 탄금대에서 적 수십명을 죽이고 물에 투신하였다.
이때 나이 45세 후에 영의정에 추종되었다.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4호
소재지 : 안산시 단원구 와동 141번지
시대 : 묘 - 선조25년 (1592), 신도비 - 현종3년 (1662)
규모 : 봉 분 - 126×350cm, 신도비 - 15.8×74×26cm
약도보기

조선시대의 충신. 자(字)는 사수(士秀), 호(號)는 피구자(披 子),외암(畏菴), 본관은 순천(順天),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훈(壎)의 아들이며 영의정(領議政) 류( )의 부친이다. 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소재한 김여물의 신도비(神道碑)에는,「무릇 충신(忠臣)·열사(烈士)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國亂)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偉勳)과 환업(煥業)으로써 그 자손을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이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 같다.

이와같은 이치는 크게 밝아 조그마한 착오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군자는 이로써 천리(天理)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라는 글귀로 시작 그의 대인(大人)으로서 의 공평무사한 행적과 애국의 단성(丹誠)이 새겨 있는데, 이 신도비는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한 것이다. 김여물은 어렸을 때부터 병서(兵書)에 밝아 20세(1567)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30세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다. 호조(戶曹)·예조(禮曺)·병조(兵曹) 등의 좌랑 (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전되고 충주군사(忠州郡事)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24년(1591)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당(黨)으로 몰려 파직 투옥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왕의 특명으로 충주(忠州)의 방어를 나섰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또 불리하면 중앙으로 가서 한양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또 듣지 아니하였으니, 김여물은 미리 패할 것을 알았다.

우리 군사가 패하자 신립이 김여물에게 묻기를, "공은 살기를 원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 "내 어찌 죽음을 아끼리오" 하고,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 이르러 적 수십 명을 맨손으로 죽이고 물에 투신하였으니 이때 공의 나이 45세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安山) 동장리(洞長里)에 장사지내고 정려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의(壯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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