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김흥도 사진 김홍도는 일반적으로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신선그림, 행사그림, 초상화 등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본관은 김해이며, 호는 단원이다.예로부터 안산은 문화적 토양이 매우 비옥했던 고장이었다.
        18세기 영,정조시대에 이곳은 학문과 예술의 향훈으로 가득차 있었다.
        점성촌(현재의 일동)에는 실학의 거목인 성호 이익이, 북쪽의 부곡동에는
        시서화의 삼절로 추앙을 받던 표암 강세황이 계셨다.

김홍도의 생애

김홍도는 1745년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조선사회는 대략 양반, 중인, 평민, 노비로 이루어진 신분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김홍도의 집안은 중인 (中人)이었다. 중인이나 의사, 통역사, 서리나 아전과 같은 하급벼슬을 맡은 계층으로 양반처럼 높은 벼슬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난한 백성들보다는 나은 위치에 있었다. 김홍도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아직까지 확실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경기도 안산 (安山) 부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김홍도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유명한 문인화가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에게 학문과 그림을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세황은 시와 글씨(서예), 그림을 모두 잘하여 당시에 삼절(三絶: 세 가지 예술을 모두 잘 한다 는 뜻)이라고 불렸으며, 예술계에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큰 사람이었다. 이런 학문과 예술에 뛰어난 학자로부터 공부한 것이 이후 김홍도가 화가로서 크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모습과 인품

김홍도는 아주 잘생긴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당시에 문학가로 유명했던 이용휴(李用休. 1708~1782)라는 분은 김홍도의 초상화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 김홍도군의 초상화를 대하니 옥같은 모습, 난초 같은 향기가 들은 것 보 다 훨씬 낫구나, 마치 한 온아한 화군자의 모습이로다.“ 또 김홍도의 선생님인 강세황도 김홍도에게 써 준 [단원기(檀園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용모가 아름답고 속에 품은 뜻이 밝으니 보는 사람은 (김홍도가) 뜻이 높고 속세를 초월하여 거리의 어리석은 자들과는 다름을 알 것이다. 성품이 또 음악을 좋아하여 매번 꽃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때로 한두 곡을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
(김홍도의 집에는) 자리와 책상이 깨끗하게 놓이고 섬돌과 성채가 그윽하고 고요하여, 거리와 가까우면서도 문득 속세를 벗어난 뜻이 있었다.
이밖에도 김홍도는 성품이 겸손하고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사람이 그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김홍도의 모습과 인품에 대한 평가는 이밖에도 많이 있지만, 위에 인용한 두 사람의 말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용휴는 유명한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의 조카로서 당시 문단의 지도자로 추앙 받는 사람이었고, 강세황은 당시 예술계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을 지척에서 모신 화가

김홍도는 영조 21년 , 즉 1745년에 나서 정조 재위 이십 사 년 간을 거쳐 순조 6년 1806년경 까지
약 육십 이 년 간 이 땅에 살았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대체로 태평했고 나라 살림도 넉넉했으며
아무런 병란이 없었던 평화스런 시기였으니, 흔히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기라고 도 일컬어진다.
그것은 영조와 정조가 각각 오십 이 년과 이십 사 년 간씩 오래 임금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에 온 힘을 쏟았던 결과였다. 그가 살았던 세월이 좋았으므로 그의 그림에도 낙천 적인
분위기가 떠돌고 무엇보다도 조선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엿보인다.
정조 임금 때 화원의 수는 통상 서른 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화원 열 명은 따로
규장각(奎章閣)에 소속시켰으며 별도로 선발해 특별한 대우를 했다. 김홍도는 규장각 설립
당시에 이미 <규장각도> 를 그려 정조에게 바쳤다.
정조는 한편 자신이 직접 가서 볼 수 없던 금강산의 명승이며 단양팔경(丹陽八景) 등도 그려 오도록 분부했는데, 이 때는 그가 지나는
여러 고을에 특별한 대우까지 당부하였다. 규장각도 또 자신이 특별히 추숭(推崇)하던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초상화도 그에게 새로
옮겨 그리도록 했다. 이렇게 국왕이 각별히 아꼈던 까닭에 화원으로는 큰 출세라 할 수 있는 경상도 안동 지방의 찰방(察訪, 지금의
역장 겸 우체국장과 유사함)과 충청도 연풍(延豊) 고을의 현감(縣監)까지 지냈던 것이다.

규장각도 사진

박달나무 있는 뜰

그가 쓴 여러 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단원(檀園)은 ‘박달나무 있는 뜰’이란 뜻으로 원래 중국 명나라 때의 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였는데, 김홍도가 그를 특히 존경했으므로 그 호를 따온 것이다. 이유방이라는 인물은 성품이 고매할 뿐만 아니라 학식 높은 문인
화가로서, 당시에는 무엇보 다도 남종화(南宗畵) 교본인 『개자화전(芥子畵傳)』 초고(草稿)의 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또 김홍도의
자(字)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능(士能)은 ‘선비만이 물질적인 것에 좌우되지 아니 하고 변함없이 올곧게 처신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홍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했을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다. 김홍도가 단원이라는 호를 사용한 것은
1781년 여름 서유구(徐有)가 단원 작품 <세검정아집도(洗劍亭雅集圖)>의 화제(畵題)에 쓴 것이 첫 예다.

조선적인, 너무나도 조선적인

단원은 산수며 꽃, 새, 동물, 풍속화, 고사인물(故事人物), 신선, 초상화는 물론 심지어 불화에 서 삽화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그림을
다 잘 그렸으니, 이를테면 ‘나라에서 으뜸가는 화가(國畵)’ 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글씨도 대단히 잘
썼으며 문학면에서 역시 앉은 자리에서 운(韻)을 맞추어 한시를 척척 지을 만큼 도도했다. 더욱이 대금이며 거문고를 잘하여
음악가로도 이름이 났으니, 필자가 최근에 확인한 그의 자작 시조 작품 두 수 역시 그러 한 방면의 조예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흔히 김홍도는 조선적인, 그것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임금의 초상화 제작에 세 차례 참여한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우선 사실적인 회화 역량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화원이다. 그것은 지금 전하는 극사실 묘사의 호랑이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그저 그림을 잘 그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그려도 아주 우리 맛이 우러나게 그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필자가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리 풍속이나 우리 강산을 그린 작품은 물론이고, 이를테면
중국의 고사인물이나 정형산수(定型山水)작품에서도 우리의 멋이 마찬가지로 농익게 우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중국
고사를 주제로 한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에 천연덕스럽게 한식 건물을 배경으로 장독대며 조선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시대를 사랑한 화가

김홍도는 명실공히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이며 한국미의 전형을 이룩한 국민의 화가다, 고 문일평(文一平)선생은 그를 일러 ‘그림 신선(畵仙)’이라고 지칭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예술의 드높고 아득한 깊이를 말한 것이지만, 나아가서 그의 생김생김 이나 인품, 그리고 초탈한 생활의 모습이 신선 같았다는 조희룡의 전기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가 국왕 정조를 지극히 가까이에서 모시는 벼슬아치였던 까닭으로 ‘신선 선(仙)’ 자를 붙였던 것인데, 조선왕조에서는 서리(胥吏)조차 승문원( 承文院)에 근무하면 자랑스레 선리(仙吏)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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